2000년대 초중반, 제가 중학생 무렵일 때엔 MP3가 한창 쓰이던 시대였어요. 256MB가 굉장한 용량인 것처럼 홍보를 하던게 아직도 생각나거든요.

옛날에 카세트 플레이어를 제가 신기해하는 것처럼, 지금은 스마트폰에 당연힌 기능인 MP3가, 별도의 기기가 있어야만 했다는 것은 또 그것대로 신기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예전엔 그렇게 256MB 남짓 되는 MP3에 50곡 정도를 듣다보니, 정말 마르고 닳도록 듣는 일들이 많았어요. 듣는 것도 비슷비슷하다보니 노래방에서 인트로만 들어도 ‘아, 이 노래!’ 하고 떼창이 가능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한 곡이 음원차트 50주 연속 1위 같은 진귀한 기록도 볼 수 있었고요.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너무 빨라져서, 몇 달은 고사하고 몇 주만 음원차트에 올라와도 순식간에 밀려나는 빠른 시대가 되었지요. 친구가 뭘 듣는지는 고사하고, 웹툰이나 게임 이야기를 해도 워낙 각자 취향들이 확고해서 공통점을 찾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만큼, '공통의 취향'이란 것을 음악에서 찾기도 더욱 어려워졌지요.
좋게 말하면 다양성이지만, 반대로는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제거된 시대이기도 해요. 공감하는 것도 훈련해야 하는 시대가 된 셈이지요.
여전히 차트에 남은 선점효과
경로의존성. 한 번 길을 찾게 되면 더욱 효과적인 길을 찾기 전까지는 계속 처음 찾은 길로 가는 성향을 이야기하지요. 경영학 용어라고 하는데, First-mover Advantage라고 합니다. 단어 그대로 처음 움직인 사람이 선점해버리는 것이지요.

노래방 차트를 보면 여전히 익숙한 이름들이 보입니다.
쿨의 애상(1998), izi의 응급실, 버즈의 마이 러브, 남자를 몰라 등등…
좀 희한한 일인 것 같긴 한데, 자그마치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도 이 곡들은 여전히 TJ미디어 애창곡 탑100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사실 사람들은 30대가 넘어가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한다고 해요. 특히 음악처럼 기호에 가까운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렸을 적 들은 것을 평생 선호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고 합니다.

결국 이건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연령 구조 변화와도 맞물려 있습니다.
예전에 발라드를 즐기던 1020세대가 이제는 3040 정도의 ‘주 소비층’이 되었고, 그들의 취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여러 면에서 2000년대는 월드컵 4강부터 시작해서 문화가 한창 활발하던 시기였으니, 그 세대 문화가 강력하게 남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미 있는 음악들이 자리를 잡은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후발주자들이 자리를 잡아야 할텐데. 사실 이게 난이도가 극한으로 뛰어올라서 어려운 점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문제긴 해요. 바로 아래와 같은 이유들 때문이지요.
1. 냉정한 알고리즘
요즘 발라드 음악이 잘 뜨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알고리즘의 변화’입니다.
유튜브도 과거엔 ‘실시간 급상승’ 탭이 있어서 새로운 음악이 빠르게 주목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맞춤 동영상 중심으로 바뀌며 새로운 콘텐츠를 밀어줄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어진거지요.

유튜브는 이제 ‘시청 지속 시간’을 핵심 지표로 평가합니다. 즉, 조회수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오래 봤는가가 중요해진 셈이지요. 결국 유튜브 같은 플랫폼은 '얼마나 사람들이 우리 앱에 머물게 하는가'를 핵심 지표로 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발라드처럼 5분 넘는 음악은 흐름이 상대적으로 루즈할 수 밖에 없지요. 이젠 5분짜리 음악을 앉아서 끝까지 듣기보단, 그 사이에 다른 일을 병행하거나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는 일이 일상이 되었으니까요.
지금 시대에 발라드를 끝까지 집중해서 듣는다는 것은 정말 드물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지요.
2. 숏폼 시대의 역설
2000년대 발라드 뮤비는 하나의 단편영화였습니다. 지금 보면 저게 뭐지(....) 싶은 B급 감성 뮤비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엔 정말 뮤직비디오에 영화 세트장까지 써가면서 엄청 스케일 크게 촬영했다는 뉴스들을 심심치 않게 보곤 했거든요.

특히 왠진 모르겠지만 조직을 배신한 남자 주인공, 숨겨주는 여자 주인공, 평화로운 일상 30초에 엔딩은 사망...인 결말은 코인노래방에서 '뮤직비디오'를 틀어놓으면 단골로 나오는 소재일만큼 정말 국밥이 따로 없었지요. 특히 임창정님이 나오는 뮤비가 엄청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5분짜리 뮤비보다 15초짜리 숏폼이 대세 아니겠습니까.

아이돌 그룹도 팬덤 참가형 챌린지를 집중적으로 하는 시대다보니, 5분짜리 발라드 영상을 한가하게 보고 "다음 영상을 보고 느낀 점을 서술하시오"라고 문제라도 낼 것이 아니라면 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단순히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일방통행형 콘텐츠에서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표현하기를 원하게 된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때문에 발라드는 '부르고 싶은 음악'이긴 해도, '듣고 싶은 음악'에선 조금 거리가 생겨버린거지요.
3. 잘하면 된다는 가스라이팅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도 정말 잘하면, 언젠간 뜨는 거 아닌가요?”
사실 지금, ‘잘한다’는 건 입장권에 불과합니다.
그냥 그건 '프로'로써 시장이 성립하는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워낙 모두가 잘하기 때문이지요. 이전 시대에는 '네가 못해서 그래', '잘하는 사람들에겐 줄을 서서 일을 맡겨' 같은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말들로 학생들을 구워삶곤 했으나... 정확히는 다들 답을 알 수 없으니 준비라도 하란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잘해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기성세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먹고살긴 커녕 입에 풀칠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뮤지션의 과잉공급 시대거든요.
특히 발라드는 차별화가 정말 어려워요. 100억을 들여도 ‘드라마틱한 차이’를 만들기 힘들고, 컨셉이나 스트링, 오케스트라 편곡 등 '먹힐만한' 요소들은 대부분 공략이 끝나있거든요. +10~20% 정도 좋은 퀄리티를 만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트렌드를 바꿀 정도의 압도적인 인지도는 사실 어렵지요. 1번 문단에서 말씀드렸듯, 사람들은 이미 2000년대 초반의 음악들을 선호하고 있으니까요.
4. 발라드 비즈니스 모델의 부재
아이돌은 티셔츠는 물론이고 다양한 굿즈, 포토카드, 팬싸인회, 콘서트 등 수익 모델이 다양합니다. 팬덤도 스스로의 이름을 직접 지어서 부르고, 커피차나 전광판이나 여러 가지를 지원할만큼 화력도 매우 강한 경우가 많지요. (물론 자리를 잡았단 전제 하에!)
하지만 발라드는 팬덤 구조가 약합니다. 보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하고, 느슨한 관계에 가깝지요.

물론 박효신님처럼 발라드로 시작해서 완성형 엔터테이너가 되어버린 우주괴수 같은 케이스도 있지만... 이건 정말 한국에서도 손에 꼽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훌륭한 롤모델임엔 틀림없지만, 시대+재능+노력+비주얼+자기관리 등등등 여러가지가 합쳐져 만든 살아있는 기적이라 재현이 어렵다고 봐야지요.
그게 아니라면 발라드는 굿즈를 사고 지원하는 덕질 문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음원 수익 아니면 공연 수익 두 가지만 남는 셈인데, 음원 수익은 요즘처럼 유행이 빠른 시대에 몇 달만 지나도 사그러들기 쉽지요. 직접 특정 액션을 취해서 바이럴을 태우지 않는다면요.
이름을 알린다 → 팬이 생긴다 → 상품을 구매한다 → 수익으로 활동을 한다
위와 같은 전략이 음악 관련 사업에서 가장 기초적인 현금흐름이 되어야 하는데, 발라드는 저 플로우가 성립하지 않으니, 음악 작업을 한다 = 돈을 쓴다라는 해괴한 개념이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은 ‘꾸준함’을 선호하는데, 뮤지션은 작업물을 매일 올릴 수 없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업물의 절대량이 적으니 당연히 눈에 띌 일도 줄어들 수 밖에 없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는 셈이지요.
수익모델이 없다 → 올릴수록 적자 → 사람들의 관심이 없음 → 자금 고갈
5. 콘텐츠 적응의 부재
아이돌은 가령 한 팀이 다섯 명이라면, 그 자체가 콘텐츠 공장이 됩니다. 케미 자체도 훨씬 다양하겠거니와, 콘텐츠를 뽑아낼 수 있는 각이 훨씬 잘 나오게 되지요.
댄스 챌린지, 리액션, 예능, 브이로그나 버블, 위버스 같은 플랫폼에서 팬덤과 소통을 하기도 하고, 매일 '우리가 살아있다'를 알리는 활동이 정말 꾸준합니다. 그게 곧 다른 활동에 있어서도 원동력이 되고, 덕질을 할 때에도 다양한 스토리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개인, 소규모에 가까운 발라드 뮤지션들은 신비주의 컨셉이나 일방통행식 소통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었지요. 물론 이야기를 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감성적인 이야기를 해야하는 발라드 보컬은 이미지 자체도 자산이긴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선 저는 뮤지션이라면 콘텐츠 자체를 계속 자체생성하는 꾸준한 루틴도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최종적으로는 습관이 되고, 신곡과 콘텐츠를 알려가는 스킬이 되더라고요.

사실 뮤지션이 되고자 하는 분들 중에선 '지망생'에서 머무르는 것을 선택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열심히, 잘 하다보면 누군가가 알아봐주고 기회를 주지 않을까 하고요. 그러다보니 '가능성이 있는 나'에게 도취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지요.
BTS 하면 완성되어있고 잘나가는 모습을 상상하지만, 사실 12년 전부터 BTS는 유튜브에 정말 무시무시하게 많은 연습 영상과 브이로그를 꾸준히 올거든요. 그 덕분에 5~6년 후 세계적 주목을 받았을 때, 이미 수백 개의 콘텐츠가 쌓여 있었지요. 물론 그걸 쌓아올린 노력과 서사도 엄청난 것이지만, 그렇게 계속 무언가 촬영하고 공개하며 업로드하는 그 용기는 정말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강철과도 같은 의지라고 생각해요.
정말, 생각하기에 기회는 살면서 몇 번 쯤은 온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때 쌓아놓은 나의 콘텐츠, 저작권이건 특정 IP건 지적재산이 없는거더라고요. 쌓아가는 것에 대한 훈련이 끊임없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발라드,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이제는 AI가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시대입니다. 플레이리스트 하나에 수백 곡이 자동으로 쏟아집니다. 저도 SUNO를 써봤지만, 정말 상상 이상으로 좋아서 깜짝 놀라게 되거든요. "과연 이걸 이길 수 있을까?" 하고요.
익명의 플레이리스트 채널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고, AI를 쓰는가는 이제 예술가의 철학적 선택으로까지 넘어오게 된 것 같아요. 쓴다고 비겁하다 할 수 없고, 안쓴다고 해서 뒤떨어졌다고 하기에도 조심스럽지요. 분명한 것은 기술의 발전은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고, 다신 뒤로 돌아오지 않을거란 사실이에요.

패션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음악은 ‘도파민 효율성’에 따라 순환이 아니라 진화하고 있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뇌를 가장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지요.
발라드는 그 흐름에서 점점 불리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질 장르는 아니라고 봐요. 뮤지션 본인이 쌓은 서사가 결합할 수도 있고, 특수한 스토리나 연속성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웹툰처럼 생명력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거라 보거든요.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진짜 좋아서 발라드를 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잘하는 것 이상의 전략을 함께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곡을 쓰고, 콘텐츠를 만들며 지적재산권을 쌓아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큰 강점이거든요.
아무리 노래가 좋아도 보여져야 기회가 있는 시대가 된 것은 좀 씁쓸한 부분이 있지만, 시대가 변한 것을 탓하기만 하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겠지요. 앞으로의 시대는 어떤 모습이 될지, 무엇을 바꿔나갈 수 있을지. 원인과 결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서 꾸준히 성장해나가야겠지요.
저도 책을 쓴 작가로썬 여러 일들을 했지만, 음원을 내는 '뮤지션'의 개념으로썬 걸음마나 마찬가지니 분발해야겠지만요. 불필요한 완벽주의나 보컬에 대한 욕심 같은 것은 좀 내려놓고 성실해질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 모두 힘내보자구요! 그래도 또 오늘 바꿔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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